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호와의 증인/역사 (문단 편집) ===== 1945년 이후 =====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4119_univ_cnt_02_xl.jpg]] 1945년 5월 구젠 강제 수용소. 마르틴 푀칭거(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음)가 석방 직후에 23명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 한정으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 중 생존자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 행위는 유럽 국가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평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체복무제 논의 때 찬성하는 쪽에서도 나치의 여증 탄압을 예시로 드는 경우가 많다.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4120_univ_lsr_xl.jpg]]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3134_univ_lsr_lg.jpg]] 1999년 9월 18일, 작센하우젠에 수감되었던 89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을 기리는 명판이 이전에 수용소였던 건물의 바깥벽에 만들어졌고 디크만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도 있었다. 2009년에 독일 학생인 안-자클린 프리저가 연방 대통령이 ‘영웅’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역사 경시대회(Heroes: Honored – Misunderstood – Forgotten)에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하고 차별의 폐해에 관해 자신이 몸소 경험한 점들을 알리기 위해 힘써온 리하르트 루돌프에 관한 전기와 인터뷰로 두 개의 상을 받았는데, 라인란트팔츠 주에서 수여하는 최우수상과 독일 연방에서 가장 우수한 세 명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루돌프는 2014년 102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사망하였으며,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대변인은 “리하르트 루돌프 씨는 사랑하는 벗이자 동료 신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 놀라운 믿음과 용기를 나타낸 그분의 생애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4119_univ_lsr_lg.jpg]] 2014년 4월 13일 일요일에는 오스트리아의 구젠 강제 수용소 기념관은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와 구젠 강제 수용소에 나치가 수감시킨 약 450명의 여호와의 증인을 기리는 기념패를 공개하는 행사를 열었다. 오스트리아의 여호와의 증인 대변인은 “마우트하우젠과 구젠 수용소에 수감된 증인들의 믿음과 용기를 이렇게 기억해 주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리스도인다운 동정심과 친절을 나타내겠다는 그들의 결심은 악에 대한 승리였으며, 길이 기억할 만한 귀감이 됩니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sunday-news.wider-des-vergessens.de/Gedenkstein-A.-Dickmann.jpg]] 2014년 9월 16일에 브란덴부르크 기념 재단은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된 아우구스트 디크만의 사망 75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행사를 열었다. 추모 행사는 디크만 씨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시작될 것이며, 뒤이어 이전에 수감자들의 주방이었던 곳에서 연설이 있었고, 노이엥가메 강제 수용소 기념관 관장이자 작가인 데틀레프 가르베 박사가 초청 연사로 왔다고 한다. [[https://www.jw.org/ko/news/%EB%B3%B4%EB%8F%84/by-region/germany/%EC%97%AC%ED%98%B8%EC%99%80%EC%9D%98-%EC%A6%9D%EC%9D%B8-%EC%B6%94%EB%AA%A8-%ED%96%89%EC%82%AC-%EC%9E%91%EC%84%BC%ED%95%98%EC%9A%B0%EC%A0%A0/#?insight[search_id]=d43cf70a-0e27-406d-8fda-47febe144452&insight[search_result_index]=0|#]] [[파일:external/assetsnffrgf-a.akamaihd.net/702015034_univ_lsr_lg.jpg]] 2015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추모 대상에 여호와의 증인도 포함되었으며, 몇 개월 뒤인 2015년 5월 13일, 여호와의 증인인 게르하르트 슈타이나허를 기리는 기념패의 제막식에는 약 400명이 참석하였으며, 오스트리아 빈의 마이들링 구의 구청장인 가브리엘레 포타파가 거리에서 열린 이 기념패 제막식의 주 연사로 참석했다. 이 기념패는 슈타이나허 가족이 이전에 살았던 빈의 마이들링 구 레겐펠트가스 68번지 건물 외부에 설치되었다. 프로그램 주제는 “도저히 총은 쏠 수가 없어요”였는데, 이 표현은 슈타이나허가 나치에게 관대한 처분을 청원하며 했던 말이라고 한다. 계획된 행사에는 슈타이나허의 가족사를 보여 주는 전시회도 포함되었으며, 전시물 중에는 1976년에 발견된 작은 상자도 있었는데, 이 상자에는 이그나츠 슈타이나허와 루이제 슈타이나허 부부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 게르하르트에게 보낸 28통의 편지 그리고 게르하르트가 부모와 함께 가진 신앙에 대해 확신을 표현하고 부모를 위로하려고 보낸 25장의 엽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빈의 주간지 「비너 베치르크스차이퉁」에 실린 한 기사에서는 이 행사를 보도하면서 이 일이 슈타이나허의 용기 있는 행동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낸 “훌륭한 기념 행사”이고, 슈타이나허가 “자기가 살면서 지켜온 원칙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라며 그를 칭송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